#허락은필요없다[나에게 필요했던 건 허락이 아니라, ‘페미니즘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위티
202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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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필요했던 건 허락이 아니라, ‘페미니즘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초등학생 때 남성이었던 선생님이 틀어준 동영상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리 저리 도망치는 태아의 모습과 그 뒤를 집요하게 쫓던 수술 도구들, 죽은 태아의 모습 등. 누군가는 도저히 그 동영상을 볼 수 없어 책상에 엎드렸고, 쉬는 시간 눈물을 쏟아내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동영상 재생이 끝이 났을 때, 반에는 정적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정적을 깨고 선생님이 말했던 것은 “‘낙태’는 살인"이라는 그 흔한 말이었습니다.

 동영상이 조작된 영상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10년이 넘게 더 필요했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석연치 못한 마음을 느낀 것은 그 동영상이 끝난 직후였습니다. ‘낙태’가 살인이라면 왜 선생님은 그토록 여자애들만을 바라보고 말을 이어나갔는지, 임신의 책임이 있는 남성 파트너는 어디에 있는지, ‘낙태’를 한 여성은 왜 ‘낙태’를 결정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 날 점심시간에 여자애들만 모여 그 동영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되돌아보면, 학교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중 여고 시절 “여자니까 몸조심해야 한다.”라고 말하던 선생님들은 뒤로 돌아서는 몰래 포르노를 보고, 불쾌한 신체 접촉을 했습니다. 더 어린 시절 성교육에서는 큰 소리로 여자애들만 “안 돼요, 왜 이래요, 그만해요”를 복창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가해자가 되지 않는 법에 대한 교육, 성적 자기결정권과 차별 금지, 내가 가져야할 권리에 대한 이야기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낙태 동영상’을 본 이후 15년이 지났습니다. 15년 전과 15년 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돌아봅니다. 죄책감을 강제화하고 성평등하지 못한 교육 시스템만이 존속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모두가 소리 높여 “청소년은 미성숙하기에 인공임신중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정부 입법안에도, 국민의힘 입법안에도 보호자 동의 없이 인공임신중지를 하고자하는 청소년들은 학대를 증빙하거나 아동보호기관장의 동의를 얻어야한다는 조항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까지 저에게 ‘낙태 동영상’을 보여주었던 선생님이, 비청소년들이 청소년 당사자보다 더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저를 만든 것은 ‘낙태 동영상’이 아니라 점심시간 ‘낙태 동영상’에 대한 불쾌한 마음들을 함께 털어놓았던 여자 친구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어른들의 허락이 아니라 페미니즘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주입식이 아니라 함께 페미니즘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여성의 몸과 인생이 찬반토론의 과제가 되지 않고, 당연히 보장될 수 있는 사회를 정치의 영역에서 만들기를 바랍니다. 21대 국회가 ‘낙태의 죄’를 폐기하기를 바랍니다. 21대 국회가 청소년의 인공임신중지권을 보장하기를 바랍니다.

신민주

#낙태죄폐지 #허락은필요없다 #청소년_임신중지권_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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