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입장일탈이 아닌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 'n번방 방지법' 이후의 과제를 제안하며

위티
2020-05-01
조회수 1906

 


 4월 29일, ‘n번방’ 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n번방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지 반년만의 일이다. 개정된 성폭력처벌법은 불법 성적 촬영물을 소지·구입·저장 또는 시청한 사람을 3년 이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강간을 모의하거나 계획할 경우, 예비·음모죄로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범죄수익 환수를 촉진하는 내용 역시 담겼다.

  시민들의 강력한 의지가 마침내 국회를 움직였다. ‘n번방’ 방지법이 통과되기까지 수백 만 시민들의 지속적인 청원과 요구가 있었다. ‘n번방’ 방지법은 지치지 않고,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말해왔던 시민들의 의지가 만든 법이다. 이제 ‘n번방’ 방지법이 디지털 성폭력의 근본적인 해결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위티는 4월 29일 통과된 두 개의 법안에 주목한다. 첫째, ‘대상아동·청소년’ 조항을 삭제키로 한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이다. 개정안은 성매매 범죄의 상대방이 된 아동·청소년을 ‘대상아동·청소년’으로 규정하여 소년법을 적용해온 기존 조항을 삭제하고, 해당 아동·청소년을 ‘피해아동·청소년’으로 규정한다. 우리는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거래수단으로 삼아야 했던 여성 청소년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알고 있다. ‘대상아동·청소년’ 조항은 생존을 위해 원치 않는 일들을 해야만 했던 여성 청소년의 경험을 ‘자발성’으로 해석하며, 처벌의 대상으로 삼아온 조항이다. 우리는 ‘대상아동·청소년’ 조항의 삭제를 환영하며, ‘자발’과 ‘비자발’의 이분법을 넘어 여성 청소년의 복합적인 경험이 더 많이 들려지기를 희망한다.

  둘째,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 기준을 13세에서 16세로 상향하는 법안이다. 미성년자 의제강간 제도는 형법 제305조에 명시된 제도로, 연령 기준의 미성년자와 성인이 성관계를 했을 때, 성인(이하 ‘비청소년’)을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처벌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아동청소년이 비청소년과의 관계에 있어 ‘성적 동의’를 표현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발상이 ‘성적 동의’의 개념을 ‘능력’ 범주로 축소시키고, 청소년의 성을 통제하는 제도와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을 비판한다. 또한 청소년의 성적 실천이 ‘일탈’로 여겨지고 음지화되는 사회에서, 의제강간연령 상향이 보호가 아닌, 보호의 사각지대를 확대시킬 가능성을 우려한다.

  위티가 제시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 누구에게는 ‘n번방’이었고, 누구에게는 ‘일탈계’였는가?” 우리는 여성 청소년의 성적 실천이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착취에 취약해지는 ‘일탈계’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에 주목했다. 또한 여성 청소년 대상 성착취는 그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위치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청소년의 사회적 권리를 박탈해온 제도와 여성 청소년의 무성적 존재로 여겨온 문화를 ‘n번방’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짚었다. 그러나 작금의 ‘n번방’ 방지법 논의에서 여성 청소년이 폭력에 무력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이들을 둘러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은 논의되지 않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의제강간연령 상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여성 청소년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이에 기인한 성착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후속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누가 동의할 수 있는가

  많은 여성 청소년이 성적 실천에 있어, 동의를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인다. 그러나 이는 청소년이 미성숙해서가 아니라, 청소년의 사회경제적 권리가 취약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생물학적 연령을 기준으로 무 자르듯, ‘성적 동의’가 가능한 연령을 구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러한 구분법은 아동청소년의 성적 경험을 ‘피해’로만 치환함으로써, 이들이 ‘성적 동의’를 표현할 수 있었던, 혹은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의 복합적인 원인에 대해 고려할 수 없게 만든다. 

  청소년만이 아니라, 비청소년 역시 사회적 위계에 따라 ‘성적 동의’ 여부를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에 처한다. ‘동의’ 여부에 대한 판단은 연령뿐만 아니라, 성별, 장애여부, 고용관계 등의 복합적인 위계와 맥락을 고려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누가 동의할 수 있는지”를 연령을 기준으로 판별한다면, 오히려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은 확산될 것이다. 

  실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 1심 판결에서 판사는 피해자가 “아동이나 장애인이 아니고 혼인 경험이 있는 학벌 좋은 여성으로서 안정적인 공무원 자리를 버리고 무보수 자원봉사로 일을 할 정도로 결단력 있는 여성”이므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는 연령, 장애여부 등이 ‘피해자다움’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었던 대표적인 예다. 

  연령을 기준으로 ‘성적 동의’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능력’을 기준으로 판별하는 사고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성적 자기결정권은 개인의 성숙도나 능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현되며, 다양한 사회적 여건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중요시해야 할 것은 ‘성적 동의’다. 항거가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면 ‘동의’한 것으로 여기는 강간에 대한 최협의설을 폐기하고, 비동의 강간죄 개정을 통해 ‘성적 동의’에 대한 합의를 확장해야 한다. 나아가 ‘동의’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연령, 성별, 장애여부, 고용관계 등 다양한 위계를 고려할 수 있는 성폭력 관련 법안이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가 성폭력 사건에서의 다양한 위계와 맥락을 고려할 수 있다면, 연령을 기준으로 하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성적 동의’를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판사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피해자가 고통 받지 않도록, 사법부 차원에서 성폭력 관련 재판에 성인지 감수성 있는 재판부를 배당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실제로 의제강간연령 상향이 필요하다며 언급되는 판례들은 애초부터 강간죄 혹은 미성년자 강간죄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거나, 판사의 성인지 감수성이 턱없이 낮았던 경우가 많다. 또한 미성년자 의제강간은 강간죄보다 형량이 낮기에,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미온적인 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 진정으로 청소년 대상 성범죄를 엄벌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비동의 강간죄 개정, 사법부의 성인지 감수성 개선 등의 과제가 먼저 이행되어야 할 것이다.



의제강간연령 상향이 만드는 사각지대들

  우리는 의제강간연령 상향이 만드는 사각지대에 대해 우려한다. 첫째, 청소년의 성적 실천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우려한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청소년의 성을 금기시하는 제도와 문화가 만연하다. 부모, 교사 등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어른들은 청소년의 연애와 성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탄압해왔다. 상당수의 학교에 연애를 금지하는 학칙이 버젓이 존재한다. 가정에서 연애 사실을 들키면 휴대폰 압수 등의 탄압을 경험해야 한다. 이렇듯 청소년의 성적 실천을 억압하는 문화는 청소년이 일상 바깥의 ‘일탈’로써 성을 마주하게 하며, 폭력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을 만든다.

  의제강간연령 상향으로, 청소년은 연애관계에 있어 더욱 취약하고 고립된 위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만16세 미만의 청소년과 비청소년 간의 연애 경험은 더욱 발화되지 못할 것이다. 비난과 처벌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관계에 대한 발화가 금기시될 때, 관계에 내포된 위계는 더욱 강화된다. 만16세 미만의 청소년이 비청소년과의 연애에서 폭력을 경험하더라도, 사회적 안전망에 의탁하지 못한 채 고립되는 상황이 계속될 수 있다. 또한 부모, 교사 등이 청소년의 연애와 성적 실천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사법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둘째, 연령에 따른 규범을 재생산하고, 규범에 따라 피해자를 분류하는 것에 우려한다. 현행 미성년자 의제강간 제도는 피해자가 의제강간 연령으로 보이지 않으면, 위법성 조각사유로 판별되어 미성년자 의제강간죄를 적용하지 않는다. 이는 미성년자 의제강간 제도가 피해자가 ‘청소년다웠는지’를 질문하는 방식으로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을 확산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피해자는 기존의 사회규범 내에서 제시되는 획일적인 청소년 상에 자신의 모습을 끼워 맞추기를 요구받을 것이다. 이러한 요구 속에서 청소년이 무성적 존재라는 사회적 통념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셋째, 아동청소년이 성착취에 취약해지는 원인을 고려한 근본적인 대책이 아님에 우려한다. 우리 사회는 아동청소년, 장애인 등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들의 성에 대해,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성적 권리를 침해해왔다. 아동청소년이 처한 폭력의 구조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채, 아동청소년을 성으로부터 격리시키기에만 급급했다. 그 결과, 폭력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비청소년 자원에 의탁해 생존을 도모해야만 했던 아동청소년의 사회경제적 위치는 은폐되었다. 

  의제강간연령 상향이 만들어낼 사각지대에서 ‘n번방’은 계속될 것이다.



‘일탈’이 되어버린 것들

  그래서 우리는 ‘일탈’이 되어버린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왜 여성 청소년의 성적 실천은 ‘일탈’로 전락하는가? 청소년의 성을 보호하겠다는 국가의 대책은 여성 청소년의 삶으로 가닿지 못하는가? 

  이는 국가의 대책이 청소년을 있는 그대로의 시민으로 존중하고 보호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원하는 ‘청소년 상’을 지키는 데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청소년을 미래의 자원으로 여기며, 현재의 권리를 유예시킨다. 청소년은 국가가 원하는 ‘청소년 상’에 부합해야만 성폭력의 피해자이자 지원의 대상으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사회에서 청소년의 성적 경험은 모두 ‘피해’로 치환되며, 순수하고 무력한 피해자가 아닌 청소년은 국가의 지원 밖에서 성착취를 감내해야 한다. 

  여성 청소년이 생존을 위해 자신의 성을 거래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성 청소년은 생존을 위해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를 견디거나, 안전망 없는 ‘일탈’을 감수해야만 한다. 가구 중심의 복지제도는 여성 청소년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으로 가닿지 못한다. 여성 청소년은 경제적 기반이 없이, 저가의 열악한 노동시장에 복무해야만 한다. 이들의 노동은 불법이자 밑바닥 노동으로 여겨지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 친권자가 청소년에 대한 징계권, 거소지정권을 가진 상황에서 청소년이 부모의 폭력을 벗어나, 합법적으로 자립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듯 공적 자원에서 배제된 여성 청소년들은 성을 거래수단으로 삼아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불안정한 삶의 토대 위에 놓인다. 여성 청소년의 성은 금기가 되는 동시에, 바로 ‘금기’라는 지점에서 더욱 적극적인 착취의 대상이 된다. 쾌락통제법 등의 성금지주의적 정책과 성적 고정관념에 기인한 성교육은 여성 청소년이 성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습득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는 ‘일탈’로 치부되며 묻어진 수많은 여성 청소년들의 일상이 다시 해석되고 들려지기를 희망한다. 여성 청소년의 성이 음지의 ‘일탈’이 아닌, 나의 욕망과 감각을 존중하는 ‘일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n번방’ 사건 이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안한다. 또한 이러한 과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청소년 당사자의 참여를 포함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 비동의 강간죄 개정을 통해, ‘성적 동의’의 개념을 확장하고, 연령 등 다양한 위계가 고려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의제강간연령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후속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셋째, 청소년이 비청소년에게 의탁하지 않고도 자원과 역량을 획득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안전망을 형성해야 한다. 

  넷째, 쾌락통제법, 연애금지학칙 등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침해하는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다섯째, 청소년이 안전하게 성을 누릴 수 있도록 다양한 경로의 정보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



2020.05.01.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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